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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년 1월15일, 거란의 공격으로 발해의 수도 상경성(上京城)이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1천86년이 흘러 바로 며칠 뒤면 그 날이다. 비운의 마지막 왕 대인선과 왕족, 귀족, 관료 등 수많은 발해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뿔뿔이 흩어졌고, 200여년간 해동성국(海東盛國)의 명성을 떨치던 발해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들이 기록한 자료는 남아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최근의 지표조사나 발굴 등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유물, 유적들이 다소 있을 뿐 지금까지 알려진 발해 관련 내용은 ‘요사(遼史)’, ‘거란국사(契丹國史)’ 등 중국 측 사서에 전하는 불과 얼마 안 되는 분량의 내용이 전부이다. 발해에 대한 여러 의문들 이러한 연유로 발해 왕조의 건국과 멸망 등에 관한 의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등 그 주체 세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과연 발해는 고구려계 지배세력과 거란, 여진, 말갈 등 피지배 토착세력의 이중구조로 존재하였는가.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경쟁관계였는가, 적대관계였는가.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발해 멸망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 나아가 발해 멸망 이후 요동(遼東) 만주일대, 송화강 하류, 흑룡강 동북 지역에 펼쳐져 있던 광활한 땅과 그 역사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것인가 등등. 수많은 질문에 대하여 답변해줄 준비와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오늘이다. 다행히 우리의 역사기록인 ‘고려사’에는 고려로 이주해온 발해유민에 관한 풍부한 사례들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발해 멸망 직전인 925년 9월에 100호가 이주해온 것을 시작으로 12월에 1천호, 934년에 대광현이 인솔한 수만 명이 몰려왔다. 그 이후 979년에 다시 수만 명, 1029년부터 1040년 무렵까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씩 집단적으로 이주해왔으며, 1116년과 1117년 2차에 걸쳐 1백 명 가까운 발해인들이 고려로 이주해왔다. 우리 안의 5%는 발해인 당시 고려 총 인구 210만명의 5%에 달하는 10만명 이상이 발해에서 이주해온 유민이었다. 이는 고려시대 400여년간 이주해온 중국계, 거란·여진 등 북방계, 몽골계, 동남아계, 일본계, 기타 서역(西域) 등 수많은 귀화인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고려로 이주해온 초기 발해 유민들은 대부분 서북 지역에 배치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후 거란의 압박이 차츰 심해지자 고려는 거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발해 유민들의 거란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거란군과의 전투 경험을 이용하였고, 이것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019년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끝나면서 더 이상 효용가치를 잃게 된 이들 발해 유민들은 대부분 남쪽으로 내려가 중남부지방의 벽지 촌락마을에 살게 되었다. 발해 왕족인 대씨가 상주군 관내 영순현에 정착하여 살던 중 13세기 몽고와의 항쟁에서 그 후손들이 공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영순 태씨로 그 존재를 확고히 한 것이다. 그 밖의 발해 유민들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고려인이 되었을 것이다. 피부색이 서로 다른 귀화인의 경우라 해도 보통 5대가 지나면 귀화한 국가의 인종으로 완전히 동화된다고 하는데 발해인의 경우 유전인자는 물론 언어와 문화까지 처음부터 고려와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발해는 우리들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총 인구의 5%라면 현재의 남북한 인구 8천만 중 4백만이고, 적어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의 5%는 발해인인 셈이다. 지난 1994년 발표되어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안겨주었던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로 시작해 ‘나에겐 갈 수도 볼 수도 없는가 저 하늘로 자유롭게 저 새들과 함께 날고 싶어…’로 끝나는 그 넓고 푸근한 바다, 발해는 우리들 모두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경기일보 - 201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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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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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인 봉수는 말썽꾸러기였다. 지각을 밥 먹듯이 했으며, 숙제는 거의 해온 적이 없었고 애들을 집적거려 공부를 방해했고, 심지어는 복도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선생님들이 타일러 보는 것도 이제는 지쳤고, 교감실, 교장실에 불려가는 것도 이골이 났다. 그렇다고 보모나 친척을 불러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다. 봉수네집은 엄마는 안 계시고 아빠 혼자였으며 사회복지기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 봉수가 상담선생 앞에 앉았다. 봉수는 언제나처럼 퉁명스럽게 대했다. 하지만 상담선생은 이를 무시한 채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상담교사: "봉수야, 너 그래도 좋아하는 선생님이 한 사람은 있지." 봉수: "…이순애 선생님이요." 상담교사: "이순애 선생님은 왜 좋은데?" 대화를 나눠보니, 이순애 선생은 다른 선생과 조금 달랐던 것이다. 우선 교실에 들어오면 이 선생은 봉수에게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봉수가 대답할 수 있는 쉬운 질문을 했고, 다른 주제로 넘어갈 때는 봉수가 내용을 이해하고 새로운 것을 해도 좋은지 확인을 했다. 바로 여기에 봉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열쇠가 있었던 것이다. 상담선생은 이제 교사들을 설득하여 이순애 선생이 보였던 \'밝은 면\'을 전파시켰다. 3개월이 지나지 않아 봉수는 달라졌다. 모범생이라 할 수는 없지만, 분명 더 이상 문제아는 아니었다. 1976년 쥐약회사로 출발한 세스코(Cesco)는 90년대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3D업종으로 그저 그런 회사였다. 그런데 창업자 전순표 박사의 아들인 전찬혁(현재 대표이사)씨가 92년 대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사장의 아들이지만, 신분을 속이고 4년이나 평사원으로 해충잡는 최일선에서 현장근무를 한다. 자신이 직접 근무한 아버지 회사는 생각했던 그런 회사가 아니었다. 현장직원들은 하루 종일 독한 소독제를 마셔야했고, 고객사들에게 천대를 받아야 했으며 그러다 보니 직원들끼리도 대화는 욕설이 반이었다. 신입사원들은 3개월 이내에 거의 100% 퇴사하고 말았다. 전찬혁씨는 4년의 현장근무를 마치고 신분을 밝히며 기획실을 만들고 본격적인 회사 개혁에 들어간다. 유니폼도 제작하고, 운영 매뉴얼을 만들고, 고객사 건물에 대한 정보도 전산화한다. 이런 멋진 시스템을 도입하였지만, 놀랍게도 직원들이 기꺼이 동참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칭찬운동이었다. 관리자들로 하여금 부하직원 개개인들의 장점을 쓰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당사자들에게 가서 이야기해 주도록 했다. 쑥스러워 망설이는 관리자들을 강제적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한번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했다. 그랬더니 회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2년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세스코 홈페이지에 20만명이나 방문해서 서버가 마비되고 말았다. "해충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먹을 수 있나?"라는 장난기 어린 질문에 세스코 사원이 친절하게 "해충은 고단백이기는 하나 박테리아가 많으니 사전처리를 잘해야 한다"고 답해 올린 글이 소문이 난 것이다. 긍정적으로 변화된 기업문화 덕분에 세스코는 우리나라 방제 시장을 90% 정도 장악하고 있으며 해외 진출을 하고 있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우리는 도전을 해야 하고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위기의식만으로 변화가 오지는 않으며 문제점만 파헤친다고 개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점에서 변화의 단서를 찾아야 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2011년도 저물어 가고 있다. 새해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변화와 도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변화와 도전을 위한 에너지는 놀랍게도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점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인일보 - 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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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18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이주민의 날’이다.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 가정’이라 불리우는 외국 이주민 가정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시화, 산업화에 밀려 신부감을 구할 길이 없는 농촌 총각들을 위해 연변처녀들과 짝을 맺어주는 사업을 시작으로 중국, 동남아 등 여러 지역에서 국제결혼을 통해 많은 외국인 여성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절차를 밟아 정착하는 외국인은 불과 20년 사이에 이제 그 숫자가 130만을 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들의 출신지역을 보면 중국(조선족, 중국인), 베트남, 필리핀, 태국, 몽골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최근 1~2년 전부터는 캄보디아,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네팔,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지역의 외국인 여성들이 이주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외국인의 국내 이주현상은 처음 출현한 것이 아니고 과거 우리 역사기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귀화인들에 관한 기록이 그것이다. 10세기 초 고려 건국부터 14세기 후반 조선 건국 이전까지 400여년 동안 우리 민족은 외부로부터 오는 수많은 외국인들을 받아들였다. 고려 초기에는 중국계 지식인이나 상인들이 왔고, 뒤를 이어 북방에서 발해유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발해유민들 가운데는 고구려계도 있었지만 만주일대에서 살았던 여진계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거란계 이주민들도 있었고, 남쪽에서는 왜(倭)로 불리던 일본계도 이주해왔다. 후기인 13세기 이후 몽골의 영향 하에 들어가면서 몽골족은 물론 색목인, 동남아인 등 더욱 다양한 귀화인들이 들어와 정착을 했다. 한국 역사상 10세기 전후 시기부터 14세기 말까지 고려시대를 중심으로 약 500년간은 국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어 함께 살았던 개방사회였다. 그러므로 무신란과 무인집권기를 제외한 이 시기는 다양성과 독창성이 한껏 빛을 발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14세기 말 조선의 건국으로 성리학의 세상이 된 이래 서구열강과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개국이 되는 19세기 말까지 500년간은 오직 이념과 정쟁과 갈등이 만연했던 폐쇄된 사회였다. 외부로부터 국내로 유입되는 외국인은 물론 중국을 제외한 그 어느 곳과도 문물의 교류가 금지되었던 시기였다. 그 이후 우리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해방 그리고 전쟁과 분단,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아직도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인 오늘로 이어져왔다. 비록 과거 우리 역사 사실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엄청난 기세로 확산되어가고 있는 다문화 사회의 실체를 접하면서 이 시대의 우리 모두가 지금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그런 속에서 우리 가운데 굳어져 있는 아집과 잘못된 편견들을 바로 잡는 작업은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 한때 우리는 단일민족임을 내세워 자랑스러워했던 시기가 있었다. 모두가 단군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한 민족, 한 자손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과거의 단일민족론이나 순혈주의는 특히 정치적, 이념적인 목적을 위해 철저히 이용되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독립운동기 우리는 일제의 조작된 민족우월주의에 맞서 싸우며 더욱 강하고 철저한 단군의 후손이 되었고, 근거 없는 단일민족주의자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편견과 아집이 인종주의적 배타성으로 이어지고, 특정 인종, 특정 민족에 대한 멸시와 냉대로 표출되었다. 최근 다문화 가정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으로 이혼률 급증, 가정 폭력, 가족 간의 불화 등이 꼽히고 있다. 물론 이에 앞서 언어와 문화의 이해부족, 경제적 어려움 등의 문제가 해소되어야 할 선결과제이겠지만 앞으로 보다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혼혈아인 자녀교육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문화 가정을 위한 이러한 근본 문제들에 대하여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그 위에 우리 모두가 힘을 모으고 관심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경인일보 - 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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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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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문학과의 융합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드높다. 포스텍이 인문기술융합연구소를 개설하여 공학에 인문학을 접목시키려 하고, 삼성전자 사장 시절 \'황의 법칙\'으로 유명했던 황창규 지식경제 R&D 전략기획단장이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을 차세대 기술의 화두로 내세우고, 대학의 인문대나 경영대에서 CEO 대상 인문강좌가 유행하며, 정부가 인문기술융합연구소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몇 년 전만해도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에 의해 비실용 학문으로 찬 밥 취급받던 인문학이 왜 갑자기 구애의 대상이 된 것일까? 최근의 인문학 열기 뒤엔 스티브 잡스의 신화가 있다. 수익률이 떨어져가던 IT산업구조를 혁신하여 다시 붐을 일으킨 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창조한 잡스가 한 때 인문학을 전공했고, 그가 기술과 인문학(liberal arts)의 접목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버럴 아트는 문학, 사학, 철학으로 대표되는 전통 인문학 분야뿐만 아니라 예술, 디자인, 종교 등도 포함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인문학 열기를 추진하는 엔진은 잡스처럼 성공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지 성공과 욕망을 비판적 거리와 상상력으로 성찰하거나 재현하는 인문학 정신이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의 인문학 융합은 잡스가 영웅으로 떠오르기 훨씬 전부터, 즉, IMF구제금융, 벤처산업 붐, 기업구조조정과 더불어 본격 시작한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린 최근 15년 이상 동안 인문학의 실용화란 맥락에서 이루어져왔다. 시장주의로 위기에 몰린 일부 대학이 역사, 철학, 국문학 등 인문학과를 콘텐츠학과로 전환하여 영화, 캐릭터, 게임 등의 콘텐츠 개발에 필요한 소재(신화, 전설, 역사, 인물 등)이나 기법을 연구했다. 콘텐츠산업의 성장 잠재력을 본 카이스트의 문화기술대학원이나 중앙대의 예술경영대학원 등 전문대학원이 기술과 경영을 예술, 인문학과 접목시키는 연구를 해왔다. 최근에는 문학의 스토리텔링기법이 영화, 게임 등 서사장르뿐만 아니라 로커티브 미디어 콘텐츠, 공연전시기획, 경영마케팅, 법정담론, 의료서비스, 관광프로그램, 도시설계, 교통설계, 자연생태사업 등에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다. 기술인문학, 경영인문학, 예술인문학, 콘텐츠인문학이 이미 국내에서 조금씩 발전해왔다. 지금까지 인문학 융합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떠밀리거나, 하지 않으면 성공의 황금알을 갖지 못하거나 뒤처질 것 같다는 불안감에 쫓겨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인문학융합이 아니다. 새 상품생산에 쓰이는 단순한 장식적 교양이거나 소재를 얻기 위한 융합은 참되지도 않고 창의적이지도 않다. 인문학, 예술과의 융합의 중요성을 말하는 정부가 취업률을 잣대로 예술계, 인문계 대학교육을 저평가하고, 기업들이 인문, 예술계 전공자의 고용을 기피하면서 외치는 인문예술융합은 시류영합형 흉내내기일 뿐이다. 기술, 경영, 콘텐츠 부분이 인문학을 제대로 융합하기 위해서는 인문정신, 즉, 지배적인 사회질서나 현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질적인 것에 대한 개방된 감성과 상상력, 타자와의 공감, 다양성에 대한 존중의 정신을 함양해야 한다. 이럴 때에 인문학이 기술과학, 경영과 제대로 접속되며, 이럴 때에만이 아이폰같은 기술혁신, 윤리의료, 윤리경영, 소수자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는 도시설계, 조화로운 자연생태사업이 가능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유비쿼터스와 더불어 도래하고 있는 “지엔알 시대”(GNR: 생명공학, 나노, 로봇)에 걸 맞는 감성, 공감, 소통의 문화를 만들 수 있다. [한국대학신문 - 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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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배안나
- 작성일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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